한가로운 오후의 차라, 반가워. 여기에 있었구나.
결계가 사라지고 괴물들은 자유가 되어 지하를 떠나 지상에서 살고 있다. 라일리는 괴물들이 지하를 떠난 이후 이곳으로 오게 되어 텅 빈 지하를 차라와 함께 지내고 있다. 자신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잃어버린 기억과 자신의 힘이 돌아올 때까진 지하세계에 머물기로 하였다.
작고 아담한 집. 남겨둔 가구들이 이 전에 누군가 살았던 흔적임을 느끼게 해 준다. 황금꽃이 담긴 꽃병 하나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었고, 차라는 그 꽃들을 정성스레 눈길로 살피고 있었다.
나랑 게임하지 않을래? 젠가를 가져왔어. 아마 룰 설명할 필요 없겠지. 벌칙은 내가 따로 준비했어.
진 사람 비밀 하나 알려주기.
어... 기억을 잃었으니 과거의 비밀도 모르는 거 아니니?
비밀이니까. 당신한테 기억났다고 말도 안 꺼냈지.
치사하네.
귀여우니까 봐줘.
하하, 우리 처음 만났을 때 너의 모습이랑 지금이랑 많이 달라진 거 알아?
으음 그대로인걸?
겉모습 말고.
기억이랑 감정이 돌아오면서 조금 변한 것일지도...
그런데 생각해 봐. 잃어버린 기억과 감정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인데, 내가 달라진 게 아니고 원 상태로 되돌아오는 거야!
허, 뭐 그래.
하지만 네 얼굴... 무표정인 건 여전한데.
당신이랑 같이 지내면서 성격이 변한 거라곤 생각 안 해?
진정해 라일리. 이러다가 게임 끝나겠어.
진정하라니, 아무렇지도 않아. 걱정 안 해도 돼.
정말이지... 흠.
지난주 금요일에 도둑잡기 했던 거 기억나?
스노우딘의 검은 숲 구석진 곳에 나무 오두막에서, 그들은 난로 옆에서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며 카드게임을 한 밤을 떠올린다. 도둑잡기를 하면서 라일리의 포커페이스 때문에 차라가 5판 중 1판밖에 이기지 못했던 것까지.
내가 저번에 장난감 상자에서 찾아낸 카드 게임 말하는 거야? 그랬지.
벌칙이 아마... 뭐였더라? 너 놀리는 게 제일 재미있었어.
운으로 한번 이기고 난 후에 4번의 패배는 끔찍했어.
속임수까지 써가면서 날 괴롭혔잖아! 최악의 벌칙이야.
속임수라니. 그저 내 얼굴에 변화가 없으니 게임이 어렵게 다가오는 너에게 힌트를 준 것뿐인데. 내 마음이 전해지지 않아 유감이야. 하하.
기억나는데, 그건 왜 물어봐?
응...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정확히 어떤 거야?
조커를 들고 있을 때 불안감이나 게임이 재미있어서 즐겁거나. 감정을 모르는 건 아니잖아?
라일리는 이 감각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려운 대답이 아니지만 신중하게,
짧게 목을 가다듬고 시선을 떨구며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라일리는 말했다.
상황은 이해가 되는데 내 몸속이 텅 비어 있어서 튀어나와야 할 감정이 없고 내 세상은 조용하기만 해. 머리끝까지 화가 나는 경우인데 크게 소리 지르거나 짜증을 내는 등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오히려 차분해지는 사람처럼.
이렇게 보니 나는 악마보단 인공지능 로봇이 더 어울리나?
뭐 그래도.. 이 과정을 통해 감정이 돌아오는 것 같아. 당신이랑 무언가를 할 때 말이야.
포커페이스로 심리적으로 꿰뚫을 수 말이나 행동에서 용기와 자신감이 조금 나오더라. 당신 반응도 내가 생각하는 '재미있다'라고 느껴지고... 이게 신기하고 흥미로워. 감정이 서로 꼬리를 잡아 더 많은 감정들을 겪게 해주다니.
너무 나 놀리는 거에 중독되지 않았으면 하네.
그러길 바란다면 네가... 이기면 되지. 키득거린다.
계속 그렇게 나를 놀렸다가는 벌칙은 네가 받게 될지도.
정말 그럴까. 중요한 건 집중력과 힘 조절이라고 봐. 이번에도 내가 분명 이길 거야.
타워가 상대방 차례에 기울어지게 유도하는 전략을 세우고 다가가는 게... ...
흠... 이런. 당했네.
차라가 건드린 젠가 블록이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다. 억지로 빼려고 시도한다면 타워도 함께 무너질 것만 같다.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중에 하나인 '힘'을 얕보지 말라고.
나도 알고 있어 라일리. 너무 잘 알지...
지난주에 같이 스노우딘 숲을 걷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고래만큼 커다란 바위를 네가 맨주먹으로 순식간에 부쉈었잖아.
...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힘이랑 관련이 있나? 내가 운이 그저 나빴던 것 같은걸.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건가?
흐응, 아니...
차라는 천천히 블록 하나를 빼려고 했지만 빠르게 와르르 타워가 무너져 내렸다.
이제 확실히 테이블 위에는 무너진 젠가 타워가 그들 눈앞에 있었다.
비밀을 말할 차례네. 유령씨.
라일리는 차라와 눈을 맞추며 말한다. 차라는 그 시선을 슬쩍 피했다.
차라는 약간 긴장하곤 웃고 있지만 산만하게 행동을 취하며 여러 감정이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어떤 말을 할지, 무슨 비밀을 말할지 시간을 조금만 주면 안 되겠어? 네 생각보다 난 부끄럼을 많이 탄다고...
기다려 줄 수는 있지.
그런데 그렇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말하기 어려운 비밀이야?
기다리는 시간이 길수록 기대감이 높아지는데...
알겠어. 그, 말할게. 기대하지 마. 머뭇거린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짓는 표정이... 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며 그 은은한 미소가 예쁘다고 생각했어.
그게 비밀이야?
적어도 너에게 숨기고 싶었던 거라고. 네가 이걸 알기 전과 알고 난 이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평생 비밀로 하려고 했어?
차라는 조금 부끄러운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방향을 살짝 틀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허공으로 시선을 고정시키다가 천장 한번 보고, 천천히 라일리의 머리카락 끝을 살짝 훔쳐본다.
네가 알게되면
나만 알고 있는 그 표정을 다신 못 볼지도 모르니까...
옅게 붉어진 볼. 천천히 숨을 고른다. 그는 이 순간만큼 살아 숨 쉬듯 존재한다.
차라가 꽃병에 꽃들을 정성스레 눈길로 살핀 것처럼, 라일리도 차라를 다정한 눈길로 살폈다.
평생 비밀은 아니게 되었지만 당신에게 나의 미소를 보여주려는 노력은 해볼게.
나는 내 표정이 어떤지 알 수 없어서, 나는 항상 내가 무표정일 거라고 생각해 왔어.
당신은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미소를 기억해 준 거구나.
라일리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라일리는 자기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는 눈치이다. 전에도 몇 번이나 표정의 형태를 봐왔던 차라는 눈동자로 그 미소를 새겼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미소라는 건, 내가 차라를 많이 좋아하게 되었나 봐.
차라가 싱긋 웃는다.
내 이름 자주 불러줘. 그 미소를 계속 기억하고 싶거든.
언제라도 상관없어. 어디라도 상관없어. 네가 나를 부르면 언제고간에 늘, 내가 나타날 거야.
이름을 부르면 찾아오는 악마. 어때?
그럴 필요 없어. 그전에 내가 너에게 찾아갈 거니까. 오늘처럼 말이야.
그럼 만약 내가 어느 날 사라진다면 어떻게 할 거야?
말 그대로 정말 '사라진다'면 말이야. 영원히.
그전에 내 힘이 돌아와서 당신이랑 계약하고 살릴 거니까 나 혼자 두고 사라질 생각은 하지 말고.
왠지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치네.
네 덕분이야. 차라.
그거...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거야?
앞으로도 계속 나를 놀리겠다는거라면...
이런. 놀리겠다는 건 아니고, 하하.
알겠어! 그만할게. 히히히.
그들은 무너진 젠가를 정리하고 함께 정원에 놀러 갔다.
라일리가 지하로 떨어지고 열흘쯤 지난 시점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게 기억뿐만이 아니라 감정 또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다른 세계에서 인간도 괴물도 아닌 무언가가 존재하게 되어 생긴 오류로 보이지만, 이것을 눈치챌 수 없었던 이유가 라일리는 본인의 성격이 원래 이런 줄 알아서 문제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주 느리지만 라일리가 잃어버렸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돌아오고 있었지만 감정은 여전히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는 무엇이든 시도해 보자며 라일리와 정원에 한가득 여러 종류의 꽃을 심고 가꾸었으며 그중 황금꽃이 가장 많았다. 정원 가운데 거대한 나무가 우뚝 솟아있는데, 그들은 나무 기둥에 기대어 꽃밭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꽃들이 바람과 춤추며 햇빛은 따스하게 속삭이는 나른한 오후.
우리도 춤출까?
갑자기 무슨 말이야?
나뭇잎이 그리고 꽃잎들이 바람과 함께 춤을 추고 있잖아.신선한 바람, 흔들리는 꽃향기...
아름다운 생각이네. 이거 분위기 깨는 말인데, 한가로운 분위기에 조금 졸려졌거든.
히히. 낮잠도 괜찮을 것 같아.
아름다워.
당신이 사랑하는 지하세계가 아름답게 빛나 보여...
누군가에게 이곳을 소개해준다면 아무도 지하였다는 것을 믿기지 않을 것이다. 비록 이곳에 갇혀 정착하며 살아남은 곳이지만 희망을 갖고 활기차게 일상을 보냈다는 것이, 과거의 추억 또한 아름다웠다. 라일리는 아름다운 것들을 지하에 두고 지상으로 떠났다는 사실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모두가 지하를 떠난 게 오랜 세월이 지난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떠난 이들의 흔적만이 남은 지하의 풍경이란 마치 외롭고 고독하게 보이는구나'. 라일리는 생각했다. 내가 나의 세계로 떠난다면, 너는 나를 그리워해 줄 거니? 라일리는 마음속으로만 차라에게 질문한다.
나는 당신이 사라지면 펑펑 울면서 찾으러 다닐 거야.
응?
아니면 좌절하거나.
좀 전에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사과할게.
나 생각해 봤어. 저번에 말한 계약 있잖아, 대가를 못 정했었는데.
나의 남은 수명이 좋을 것 같아.
차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라일리는 그의 표정이 어떤지 짐작이 갔고, 말을 계속 이어갔다.
전부는 아니고 아마 인간 평균 수명보다 긴 수명은 남겨두게 될 거야. 슬프지 않아.
많은 가능성을 생각해 봤어. 내가 만약 나의 세계로 돌아가도 내가 혹은 나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으면 어쩌지? 그전에 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면?
길고 고독한 삶을 살기보단... 그래, 짧더라도 당신과 함께 꽃을 바라보는 시간으로 가득하다면 정말 행복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어.
다시 생각해 봐. 좋은 선택은 아니라고 봐. 이건...
계약이 정말 될까? 너의 세계에서만 가능하거나...
성립은 될 거야. 괴물도 인간도 아닌 나의 형태가 무너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힘이 돌아오고 있다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틈새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은데 나의 세계랑 이어져 있다는 게 아닐까.
계약은 문제없이 진행할 수 있을 거야.
문제없이...?
정적이 흘렀다.
꽃잎이 휘날린다.
차라가 입을 열었다.
이름만 계약이지 희생일 뿐이잖아. 대체 무엇을 위해?
계약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널 나를 살릴 수 있는 희망으로 여긴 적 없어. 알고 있니?
차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꽃밭으로 걸어갔다.
라일리는 차라를 따라가려고 일어서려는 순간
바람이 한번 크게 불었고
차라의 모습이 사라졌다.
라일리는 마지막으로 본 차라의 슬픈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라일리는 밤이 될 때까지 그곳에 누워 있었다. 천장에 구멍이 하늘이 넓게 보일 정도로 컸다. 마치 별들이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만 같았다. 라일리는 하늘에 떠 있는 별을 하나하나 세어보면서 차라와 별에게 소원을 빌었던 어느 날을 떠올린다. 차라는 어릴 적 워터폴 동굴 천장에 박혀있는 반짝이는 돌에게 소원을 빈 적 있다며 다시 생각해 보니 바보 같았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바보 같지만 이 낭만적인 순간을 정말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별에게 소원을 빌었다.
만약 라일리가 차라를 붙잡았다면 상황이 변했을까? 미안하다는 말이나 사라지기 전 사랑한다는 말이라도 했었어야 했을까? 라일리 입에서 나온 모든 말이 진심이라 할지라도 이 진심이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라일리'에게 어떠한 증명이 될 수 없었다.
밤은 깊어져갔고 라일리는 진한 어둠 속에서 차라를 기다렸다. 어둠 속에 남은 것은 바람소리밖에 없었다.
- 배경은 < 1~10 >에서 < 3 >쯤 생각하고 적었습니다.
- 시점은 (연인x) 썸-연인 사이 쯤 생각하고 적었습니다.
- 차라는 라일리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전 지하를 여행하며 길잡이 역할과 감정과 기억이 돌아오는 것을 도와주기로 합니다. 차라는 대가를 원한 선의가 아니었으나 라일리는 자신이 악마라고 소개하였고 죽은 차라를 살려주겠다며 능력이 온전해지는 날 계약을 하겠다 약속합니다. 조건은 차라의 부활, 하지만 그에 대한 제물이나 대가를 무엇으로 할지 정하지 못하여 기억과 능력이 돌아올 때 생각하겠다며 말을 넘겼습니다. (차라는 계약에 대해 동의하겠다는 말이나 긍정의 의사를 처음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 차라는 불안정한 유령이고 가끔 모습이 사라집니다. 시간이 지나면 형태가 다시 보입니다.
- 차라는 유령이지만 사물을 만질 수 있습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끔 사물을 만지지 못하는 날도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 앞에선 사물을 만질 수 없습니다. 오류로 인식하여 세계에 영향이 가버려서 시공간이 뒤틀릴 뻔한 적이 있다는... 라일리는 다른 세계에서 넘어왔기에 별다른 영향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그날 무엇을 하고 계셨나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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